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원 토막 살인 사건 (문단 편집) == 기타 == * 피해자는 1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집으로 귀가하던 중이었다. 휴일이어서 마을버스가 일찍 끊긴 데다 2,000원이 조금 넘는 택시비라도 아끼기 위해서 버스와 도보를 이용했다. 아버지는 [[일용직]] 근로자,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는 등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졸업 후 고졸로 취직해 2년간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경리]]로 일했다. 이 때문에 늦은 나이에 대학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렇게 번 돈으로 군산의 한 [[전문대]]에 진학했다.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을 벌어가며 혼자 힘으로 졸업했지만 지방 전문대라는 이유로 학력 차별의 벽에 부딪혀 취업이 쉽지 않았다. 결국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짬짬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공부와 일을 병행하자니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학원비 부담까지 겹쳐 3년 만에 꿈을 포기했다. 곽 씨가 고향인 전북 군산을 떠나 언니[* 1981년생]가 사는 수원으로 올라온 것은 사건으로부터 8개월 전이었다. 경기도 오산에 있는 휴대전화 하청업체 부품 공장에 다니다가 사건 두 달 전인 2012년 2월 집 근처 공장으로 옮겨 일을 하고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일을(그것도 밤까지 [[야근]]을) 하고 그렇게 주말까지 나가 일을 해도 [[비정규직]]이라 한 달에 170~180만원밖에 받지 못하는[*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적은 보수였는데 심지어 주말근무에 야근까지 한 결과라는 것을 감안하면 최저시급에 겨우 턱걸이나 한 수준의 형편없는 금액이다.] 등 정말 힘들게 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절약해 가며 대부분 부모님에게 드리는 등 가족 생활비를 대고 회사에서 1달에 10만원이 조금 넘는 밥값을 아껴서 조카에게 용돈을 챙겨주기도 해 함께 사는 조카들은 엄마보다 이모를 더 따를 정도로 자상했던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07/2012040700102.html|피해자 남동생 인터뷰]] 이런 사람이 잔인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으니 사람들은 더욱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 유가족들은 수면제 없이는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으며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한 고통이었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OO아! 사랑하는 내 동생 OO아! 너를 보낸 지 1년이 지났구나. 시간이 갈수록 너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 힘이 든다. 1년 전 그날. 얼마나 무서웠니? 끔찍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만 나와.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단 한 번만이라도 너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공포에 질린 끔찍한 장면만 떠올라. 살고 싶다는 생각에 경찰을 찾았을 텐데, 내 동생이 느꼈을 두려움과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져. 그런데도 이 나라는 변한 게 없구나. 너의 억울함만은 꼭 풀어주고 싶었는데… 너무 미안해. > >엄마·아빠는 엽기적인 살인마를 평생 먹여 살려주는 나라에서 너를 낳은 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셔. 조카들은 아직도 자장가 불러주던 이모를 찾는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를 가슴에 묻은 우리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 가지만 이젠 힘을 내보려고 해. 그러니 그곳에서는 나쁜 기억 모두 잊고 편히 쉬어. 사랑하는 내 동생 OO아! 28년 동안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추억을 안겨줘서 고마워. 가슴 찢어지도록 보고 싶다. 그리고 미안하다.” >---- >피해자 언니가 1주기 때 쓴 편지[[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2510039|#]] * 당시 사체 훼손의 특이한 점은 다른 토막살인과 달리 절단된 부위는 얼굴, 목, 손(목), 발(목)만이고 내장을 적출한 뒤 나머지는 살을 발골하듯 잔혹하게 제거해 냈다는 점이다. * 이후 인육캡슐이 다시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이 사건이 다시 언급되었다.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09043608753385016|#]] * [[2014년]] [[12월 4일]] 또 다른 사건인 [[수원 토막 시체 유기 사건]]이 발생했는데 토막 시신 일부가 오원춘의 집과 1.5km 반경 안에서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거기다 이 사건의 범인 [[박춘봉]]도 중국 조선족인 걸로 드러나면서 [[조선족]]에 대한 인식은 크게 나빠졌다. * 문제는 조선족들 본인의 대응이었다. 당시 조선족 커뮤니티인 모이자 게시판에서는 범인인 오원춘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오죽하면 그랬겠나 하는 식으로 피해자를 모욕하는 글과 댓글이 계속 올라왔고 많은 한국인들도 이를 확인하면서 여론이 악화되었다. 이들은 과거 논란이 된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에서도 한국인이 문제라 죄가 없다는 식의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강력하게 비판했다면 '개인의 일탈'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 제 식구 감싸기 때문에 '쟤네는 다 저렇다.'는 식의 특정 집단 전체에 대한 혐오로 번지는 일은 흔하고 불행히도 이 사건도 그런 전철을 고스란히 밟게 된 셈이다. 게다가 이 사건 이후에도 조선족이 흉악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다.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66|시사인]]에서는 한 조선족이 일으킨 특수 사건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의 원인은 지역 '''슬럼화'''라는 것이다. [[슬럼]]화된 지대는 치안ㆍ보안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사건이 발생한 지동 일대는 전형적인 구도심 지역인데 한때는 동네가 번성한 적도 있었고 지동과 가까운 [[수원역]]과 [[팔달문]]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에 택지개발 바람이 불면서 '영통지구' 등이 생겼고 지동을 비롯한 고등동 등 도심 지역은 방치되기 시작했다. 1997년 지동과 인접한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고 '문화재 보존' 등을 이유로 개발 기피가 심해지면서 구도심의 슬럼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 2007년 이 동네를 포함한 20여 구역에 재개발 바람이 불었는데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지역 사정이 더 나빠졌다는 게 동네 사람들의 설명이다. 부동산업을 하는 임 아무개씨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동네 관리가 아예 안 된다. 사정이 나아진 사람들은 생활 여건이 좋은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철거가 예정된 빈집은 자연스레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지동주민센터 관계자는 "전입ㆍ전출이 많아 유동성이 심하다. 노인들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인근 초등학교는 [[기초생활수급자]] 자녀가 전교생의 절반에 가까울 만큼 늘어나기도 했으며 이곳으로 전입한 [[외국인 노동자]]도 많아졌다. 사건이 벌어진 2012년 기준으로 지동에 거주하던 외국인 1,347명 가운데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이 1,227명으로 절대다수였다. 지동초등학교의 [[다문화 가정]] 자녀 수는 3, 4명에서 9명으로 [[더블링]]되었다. 아버지가 한국인이라 한국 국적이고 스스로 밝히지 않은 경우까지 합치면 더 많을 것이다. * 원래 소외된 지역, 특히 철거가 예정된 구역은 보안의 [[사각지대]]가 되기 쉽다. 7,300가구 16,000여 명이 사는 동네에 방범용 CCTV는 단 7대였다. 집들이 낮은 담장 사이로 오밀조밀하게 얽혀 있어 마음만 먹으면 담을 넘기도 쉬운데도 평소 경찰이 순찰을 도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기막히게도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매일 밤 8시만 되면 경찰차가 동네를 순찰하고 CCTV도 추가로 2대 더 설치됐으며 이후에는 경기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수천 대를 늘렸다. 5월에는 시내 뒷골목 등을 24시간 CCTV로 감시하는 첨단 'U-City 통합센터'(범죄징후를 포착하는 즉시 순찰차에 영상을 보내 경찰과 공조하는 시스템)를 개설했다. * 사건이 발생한 동네도 큰 충격과 타격을 받았다. 끔찍한 사건 이후 집주인들은 집을 내놓는 경우가 많아졌고 전세기간이 남은 세입자들도 이사를 갔으며 거주민들 외의 유동인구가 줄면서 집값은 더 떨어지고 자영업자들은 장사가 안 됐다. 부동산중개업소는 다른 동네에서 지동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 영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1년 만에 인적 없는 유령마을로 전락했다고. 애초에 지역이 슬럼화된 것이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었는데 더 심해진 셈이다. 이에 2015년 [[대한민국 경찰청|경찰청]] 국민디자인단은 이곳을 대상으로 '범죄예방디자인을 통한 행복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지동 주민들과 주민센터, 경찰청, 수원시청 관계자들이 함께 아이디어를 내 CCTV에서 경찰관의 목소리가 녹음된 음성을 재생해 주민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된 부분을 완화시켰고 주민들간의 신뢰 회복을 위해 동네 목욕탕을 커뮤니티 센터로 탈바꿈시키는 등의 노력을 했다. * 이 사건에 관련된 일선 경찰과 112신고센터 직원 등 11명이 징계를 받았고 그만두거나 대부분 다른 곳으로 보직 이동했다. * 2012년 6월에도 이 사건 현장 700m 거리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경찰의 미흡한 신고 전화 대처가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정확한 위치와 함께 폭행 신고가 접수된 현장으로 뒤늦게 출동하던 경찰이 굳이 전화를 걸어 사건 발생을 재확인했고 이를 가해자가 받아 오인 신고라고 하자 출동 없이 복귀하며 신고도 취소 처리했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20623/47228768/1|#]] 여기에 오원춘 사건까지 터지자 2014년 경찰의 신고 대응 시스템이 전격 개편되었다. 신고 접수부터 경찰관 배치까지 모든 시스템이 대폭 변경되었고 112 인력을 170명이나 늘리고 부적격자를 솎아낸다며 전국의 신고접수 요원 2154명 가운데 235명을 교체했다. 112 상황실 근무를 3조 2교대에서 4조 2교대로 바꾸고 인사 혜택을 줘 유능한 인재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신고가 들어오면 무엇을 어떻게 물어봐야 되는지 매뉴얼을 만들어 교육도 시키고 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개편하냐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한 경찰 고위 간부는 “오원춘 사건이 없었다면 112 개선 작업이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 한 프로그램에서 [[중국]] 현지에서 오원춘의 지인에게 인터뷰를 한 결과 중국에 있을 때 [[중국 경찰]]의 오토바이를 절도한 사실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 당시 촬영되었던 CCTV에 한 여성이 망을 보는 듯한 장면이 촬영된 바 있어서 공범이 또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증거는 없다.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1828.html|칼럼에서]] 사건 당시 경찰의 무능 대처 핵심 원인을 '시국치안 편중'이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래 경찰청은 [[2008년 촛불집회]]와 [[쌍용자동차 사태|2009년 쌍용차 파업 진압]] 등에 막대한 장비와 경력을 동원하는 등 시위/집회 단속만 강경했지 일산 초등학생 납치미수 사건 당시 대처 등에서 보듯 민생 치안엔 무능했다는 것이다. * 최초 통화된 경찰의 대응을 [[나쁜 녀석들(OCN)|나쁜 녀석들]] 3화에서 인용한 듯 하다.[* 극중 [[남구현]] [[서울지방경찰청|서울]][[지방경찰청장]]([[강신일]] 분)이 휘하 경찰서장에게 '''네 시간! 니 관할서 아 들이 어리버리 깐 그 네 시간 사이에 범인이 피해자를 죽이고 도망갔다고!''' 하며 대노하는 [[https://www.youtube.com/watch?v=uZtgwKdULaQ|장면]].] * 2015년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의 축제 중에 한 학생이 오원춘을 소재로 연 주점이 있어 논란이 되면서 축제가 하루 진행된 후 취소되었던 적이 있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외국인 지문날인 폐지는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금기시되는 주제가 되고 말았다. 인터넷 여론은 당연히 좋지 않으며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사상 최악의 이슬람 테러단체]]까지 생겨나는 바람에 대한민국에서 다시는 외국인 지문날인을 폐지하자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 [[중국]]에서 유사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1996년 [[중국]] [[난징]]의 [[난징대학]]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20대 여성을 납치하여 2천 토막을 내고 그냥 보기에 고깃덩어리 같은 시신을 삶아서 [[비닐봉지]]에 담아 유기한 점이 비슷하다. [[댜오아이칭 사건]] 참고. [[공소시효]]도 끝나고 증거가 남지 않은 [[미제사건]]이다. * 동년 5월 24일 [[캐나다]]에서도 포르노 배우 [[루카 매그노타]]가 이와 비슷한 살인 행각을 저질렀다. 이후 살인 과정을 '1 LUNATIC 1 ICE PICK'라는 제목으로 올려 이 키워드는 [[절검단]]의 최고 등급으로 올라와 있다. 그는 25년 뒤 가석방 가능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 당시 오원춘의 [[국선변호인]]은 이후 [[재심]] 사건 전문 [[변호사]]로 알려지는 [[박준영(법조인)|박준영]] 변호사였다. [[국선변호인]]은 [[국가]]로부터 [[사건]]을 지정받아 [[변론]]을 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다. 다만 전체 재판과정에 관여한 것은 아니고 구속 후 영장실질심사까지를 담당했다고 한다. * 이 사건과 2년 뒤에 벌어진 [[수원 토막 시체 유기 사건]] 등 여러 사건을 계기로 [[팔달구]][* 원래는 남부경찰서가 있었으나 2003년 [[영통구]]가 분구되면서 경찰서가 없어졌다. 현재 팔달구는 남부경찰서를 비롯하여 [[장안구]]의 중부경찰서, [[권선구]]의 서부경찰서가 나눠서 맡고 있다. 참고로 본 사건은 중부경찰서가 수사를 맡았다.]에도 [[경찰서]]를 설치하라는 여론이 높아져 수원팔달경찰서가 개청하는 것이 확정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기존은 남부, 중부, 서부경찰서는 각각 영통, 장안, 권선경찰서로 바뀔 예정이다.] 2025년에 개청할 예정이다.[* 현재 이런저런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어 개청이 연기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